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JKS連邦総本

나가사키 카스테라 (長崎カステラ/Pão de Castella de Nagasaki) № 001 본문

지구식품관청/지구식품관기획

나가사키 카스테라 (長崎カステラ/Pão de Castella de Nagasaki) № 001

황후펭귄 2021. 4. 9. 15:46

남만에서 지팡구Zipangu까지 배타고 건너 온 단빵

카스테라カステラ는 에스파냐 중부 카스티야Castilla 지방의 빵, 비스코쵸Bizcocho de Castilla를 16~17세기 포르투갈 선교사가 '빵 데 카스텔라Pão de Castela, "빵데로 (Pão de lo)"라고도 함.'라는 이름으로 일본 큐슈 북부에 자리한 히라도平戸에서 먼저, 그리고 나중에 조금 더 남쪽의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에서 다시 투척하고서야, 그대로 일본인의 손으로 일본화된 스펀지 케이크류의 양과자(洋菓子)를 가리킵니다. 중세 일본어 표기법으로는 '카스티야'를 뜻하는 'かすていら(카스테이라)'.

 

이름부터가 '다시 구운(Bi-z+Cocció)[각주:1] 과자'를 뜻하는 비스코쵸의 친척 꼴이나, 카스테라는 수분함량이 높아서 굳이 구분한다면 생과자(케이크)로 분류해도 위화감 없는 촉촉한 녀석입니다. 특이점으로, 그런 비스코초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음식이자 일본에서 변형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다름아닌 건빵(乾パン=Biscuit)입니다(...)

 

이 글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 히라도의 카스테라는 카스도스를 참고.

 

의도치 않게 만들어졌다가, 의도하고 만들게 된 전통

비스코쵸, 빵 데 카스텔라, 그리고 나가사키 카스테라까지 모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으로서, 정품으로 인정받으려면 들어가는 재료는 반드시 밀가루, 계란, 꿀, 설탕의 4가지만 쓰여야 할 것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는 1713년 저술된 테라시마 요야스[각주:2]의 「화한삼재도회 (和漢三才圖會, 와칸산사이즈에)[각주:3]」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즈치모모야마(전국시대)의 일본에선 그 ㅅ사가지 네가지 모두 값비싼 고오오급 식재료였고, 그 중에서도 설탕과 꿀은 엽전(小判) 싸대기를 후려치더라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는지라 미즈아메水飴, 물엿를 쓰는 일이 더 잦았는데, 이게 에도 후기 시점에 와서는 아예 그냥 물엿 고정으로 바뀝니다.

 

여담으로, 계란에서 머랭을 치는 방식같은 세부적인 조리법 정도는 바꿔도 별 상관없는데, 본품 자체에 영향을 주는 바닐라 에센스를 넣거나, 만들기 용이하도록 식용유나 버터와 같은 기름을 넣거나 하는 것은 모조리 사도로 칩니다.[각주:4] 하지만 사도짓을 한다고 해서 "카스테라"라고 불릴 수 없다는 것은 아니며, 가까운 사례로 대만 카스테라(蛋糕)[각주:5]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카스테라의 표준이 된 「나가사키 카스테라」는 바닥부분에 자연스레 생긴, 자라메ザラメ라고 하는 설탕결정이 박혀있는 것을 트레이드 마크로 삼습니다. 다만 그 '자라메'라고 하는게 의도하여 박아둔 건 아니고, 설탕 정제 기술이나 혼합 기술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제 아무리 잘 섞는다고 해도 사탕수수를 졸여만든 원당[각주:6]의 불순물 덩어리 등이 꿀의 잔해물과 결합하면서 덩어리지기 마련인지라, 굽는 중에 자연스레 가라앉아 생기던 것이었는데, 때문에 제대로 만들었다는 상징으로 통했던 것입니다.

 

허나 정제기술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는 되려 덜 섞이듯 허당부리는게 더 어렵다보니, 아예 시판 자라메(...)를 미리 깔아두고 위에다가 반죽을 부어서 만드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티나게 균일히 자라메가 박힌 카스테라가 소위 말하는 '진퉁'으로서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 외 카스테라 품질의 척도는 단면을 보았을 때 구멍이 적고 치밀하면서 규칙적인 패턴을 가진 조직일 것, 으스러지지 않으면서 폭신하지만 이에 들러붙지 않아야 하고 떡처럼 질긴 식감이지도 않을 것, 단맛이 고르게 퍼져 있어야 하되 입 안이 아리도록 달지도 않을 것, 갈색 부분이 너무 쓰지 않고, 계란 노른자의 고소한 맛이 살아있어야 할 것 등이 있습니다.

 

유서깊은 키리시탄キリシタン 신부님이 주신 달콤한 빵菓子パン

익히 알려진대로, 카스테라는 유럽에서 일본으로 유입된 남만교역의 산물입니다. 같은 루트를 탄 별사탕金平糖(콘페이토) 같은 것들이 교역품으로서 들여온 것에 반해, 카스테라는 극동 아시아 지방에 가톨릭을 전파하려던 스파이 선교사들이 달달한 빵(과자)이 미치도록 먹고 싶은데 우유&버터가 없는 환경에서 만들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것이 카스테라였다가, 그걸 인근 지방의 높으신 분들이 꽤나 눈독들이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들을 매수(?)할 생각으로 배포하면서 알려진, 175도 정도 돌아간 루트를 타며 전파되었습니다.

 

다른 남만 음식에 비해서 카스테라가 유독 쉽게 퍼질 수 있었던 건, 일단 귀하디 귀한 단맛 덩어리라는 것은 제 1 매력이고, 그것도 소젖이나 젤라틴 등이 필요없는 점에서 일본인들이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지 않았나를 정설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선조격인 비스코쵸의 또한 계란(머랭 및 노른자), 꿀(설탕), 밀가루 - 3가지 재료를 동일한 분량으로 넣어서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나가사키의 것이 유명해진 것도, 당시 막 들어선 에도 막부가 남만인에게 열어준 항구는 고작 나가사키, 그것도 가장 끄트머리인 데지마出島에만 상륙허가를 줬기 때문이지요. 그렇게까지 가게 되는 경위를 알아보자면, 남만무역(南蛮貿易)의 신설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믈라카 왕국[각주:7]을 점령한 포르투갈 상선대는 마르코 폴로가 유학하면서 신천지(?)로 점지한 나라, 명(明)을 향해 키를 틀어 겨우겨우 아오먼澳門, 마카오땅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만, 그때 명의 조정은 그 포르투갈 상인이 믈라카를 집어삼켰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는 본토 침략을 우려하여 아오먼에 그냥 가둬버립니다. 이에 개무룩한 상선대는 대만 섬으로 경로를 틀었고, 서북방향으로 돌아 올라가 류큐琉球를 거쳐 황금의 땅(?)으로 알려진 지팡구Cipangu(=Zipangu)로 향했는데, 마침내 처음 상륙한 곳이 바로 사츠마 보우노츠薩摩坊津, 지금의 카고시마 남부였습니다.

 

이때의 일본은 전국시대戦国時代, 1467~1573 정도로, 약 20여개의 쿠니(國)로 쪼개져 치열한 외교와 전쟁으로 세력싸움을 했었고, 그 최종 목표로서 덴노가 있는 교토(京)를 차지하는 것이, 당시 정치가로서의 최대 과업이었던 시절입니다.

 

중앙정권이 힘을 못 쓰는 틈에 들어온 포르투갈 상인들은 영주들이 발달된 '신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을 눈치채고 각 쿠니마다 스파이선교사를 심어서 교류를 빙자한 무역을 했는데, 일본 조총(화승총)의 조상 격인 타네가시마 총[각주:8]또한 이때 기술제휴로 만들어진 산물입니다. 사츠마의 다음 타겟으로는 큐슈 동부의 오오스미大隅, 지금의 미야자키와 오이타와 북부의 히젠肥前, 지금의 후쿠오카와 나가사키, 쿠마모토 북부.인데, 히젠국의 최외곽 항구마을인 히라도 섬에는 1550년(텐몬 19년)에 상륙합니다.

 

특히 히라도 항구를 자주 이용하였는데, 히라도는 그 옛날 쿠카이(空海)를 비롯한 수많은 승려가 중국 유학을 다녀오는 발판으로도 쓰인 전적이 있던 국제항구(외항구)였는지라, 배타적인 성향이던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남만인들이 들락날락하는 게 그리 신기할 광경까진 아니게 보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히라도의 다이묘(영주)인 마츠라 타카노부[각주:9]는 부강해지려는 목적으로 포르투갈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빼내오고자 일본 최초로 자유남만무역협정FNA, Free Nanban-trade Agreement을 체결하며 닥치는대로 서양제품을 사들이고, 교회도 일단은 지어주는 등으로 정착을 유도했습니다. 적어도 카스테라라는 것을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배웠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역사는 분명 히라도에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여튼간 그러한 포교 면책권을 뿌린 결과로, (당시로선) 이상향을 전도하며 평생토록 잊지 못할 신부님의 달콤한 빵을 마구 뿌리는 기독교가 일본 내 자국민들 사이에서 믿으라는 다이묘는 안 믿고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지라 그 신도=키리시탄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때문에 신토교와 봉건주의 아래에서 일본 사회를 유지하던 지도층은 정치적 인기를 강탈될 것을 우려하여 안달복달 했고, 때문에 사소한 시비에서 유혈사태로 이어져버린 사건[각주:10]이 터지자마자 옳타쿠나 하며 바로 단교 때리고 샷따를 내려버립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빵맛이 그리워서 갑작스레 외국 문물이 끊겨버리자 순간적인 퇴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신기술이 고팠는지 변심하여 다시 닫을까 말까 닫을까 말까 닫을까 말까를 반복했으나, 그 사이 포르투갈이 스페인 산하로 격하되어[각주:11] 거래처 자체가 몰락하고 말았고, 또한 도쿠가와 정권이 세운 에도 시대(1603년)의 돌입 직후 곧장 쇄국정책이 시행되었으며, 훗날(1609년) 스페인에서 독립한 네덜란드가 겨우겨우 쇄국정책을 뚫고 다시 히라도에 무역관을 설치, 이후 영국에게 무역 판권을 넘겼다가 1623년에 또다시 폐쇄됩니다.

 

그러던 1641년에 나가시키 본토쪽에서 에도 조정의 압력을 이겨내고 힘겹게 새로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시켰지만, 그 대신 외국인의 체류지를 모조리 바다위 인공섬으로 밀어버리는 미즈기와水際, '물가'라는 뜻. 전법을 강요하여, 그 결과로 히라도는 몰락하고 외부교역의 중심지가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바뀌어버립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가사키 카스테라가 데지마(나가사키)의 명물이 됩니다.

 

加須底羅가수뎌라, 꼭 먹고 말거야

한편 훨씬 동쪽에 자리한 오와리尾張, 지금의 기후현의 영주로 지내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또한 서양인 선교사를 가까이 두어 해외 정보를 꾸독구독하고 있었는데, 이 점을 들어 각종 창작물에서는 카스테라를 가장 먼저 먹어본 일본인으로서 오다 노부나가를 자주 출연시키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이렇다 할 인과관계나 증명수단이 없기에 야사 수준에 멈춰있습니다.

 

다만 완전 허무맹랑한 것도 아닌게, 오다 노부나가는 특히나 총기류를 비롯한 서양 과학에 매우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포르투갈 및 네덜란드 출신 남만 선교사들과 밀접히 교류하던 것이었고, 그런만큼 그들로부터 과자에 관한 이야기도 분명 듣기는 했을 것이며, 그 시점에서 카스테라 또한 이미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오다 자신도 굉장히 높은 신분인 만큼, 언젠가는 필히 직접 먹어봤을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카스테라의 직접적인 원형인 빵들로[각주:12]는 장기보존이 가능하여서, 군량과 같은 전략적 요소로서도 오다의 관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다만 일본에서도 너무 깊숙한 곳에 살았던 그였기에, 어디까지나 '최초의 취식자'라는 가능성이 매우 낮을 뿐이지요.[각주:13]

 

여튼간 이런 유행은 교토까지 전파되어 덴노조차 카스테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영향으로 지방 영주 및 세력자들에 의한 출세 목적의 선물 상품으로까지 유통되면서 카스테라는 명불허전한 일본 내 양과자(洋菓子) 역사의 첫 머리를 장식하게 됩니다.

 

때문에 어지간히도 오래된 일본 양과자집이라면 반드시 고유의 카스테라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간접열 굽기라는 개념이 없던 일본에서 단지 카스테라를 구워다 팔기 위해, 아예 일본식 오븐引き釜, 히키가마을 새로 개발할 정도로 집착이 심했습니다. 그 집착의 역사가 거의 400년이 다 되어가니, 지금도 일본 제 1의 간식자리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위/아래로 숯을 넣은 조리기구인 히키가마. (www.castella.co.jp)

허나 실질적으로 메이지 시대에 돌입하기 전까지의 오랜 기간, '카스테이라'는 그야말로 환장 환상의 과자에 머물렀습니다. 그 이유라 하면 당시 일본에도 막부은 명・청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류큐(오키나와)를 온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었고[각주:14], 그나마 류큐와 직접적 관계가 있으면서 기후상으로도 재배가 가능할 것 같은 사츠마薩摩, 지금의 카고시마 일대란 곳은 일본에서도 가장 조정 말 귓등으로도 안 듣기로 유명한 이단아 같은 존재였으며, 봉건주의 사회 특성상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희생양이 되는 영주를 찾는 것도 무리수[각주:15]에 가까웠기 때문에, 카스테라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설탕을, 여전히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설탕을 굳힌 별사탕은 거의 먹을 수 있는 보석처럼 취급되었고[각주:16], 설탕 뿐 아니라 계란까지 아낌없이 쏟아부은 카스테라도 양갱을 능가하는 상당히 고가의 음식이 되는지라, 당시의 상류층은 최고급 녹차와 곁들여 먹으면서 대외적으로 여유로운 돈지랄 라이프를 증명하는 척도로 이용했습니다.

 

17세기 초부터 등장한 조선통신사 또한 일본측의 만찬 진상품을 통해 「가수텨라」라는 것을 처음 접하였고, 이는 조선의 서유구가 저술한 백과사전, 「임원경제지」의 정조지(鼎俎志) 제 3권 내 과정지류(菓飣之類)편에도 일본 한자명 그대로 옮겨온 "가수저라(加須底羅)"[각주:17]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달콤한 맛의 명성은 사신들로 하여금 토모노우라 절경과 함께 일본 사절단의 큰 기댓거리로서 자리하게 되었는데, 정작 에도 막부측도 재료 구하기가 워낙 어려웠던터라 진상하지 못한 때도 있었으며, 이때는 사절단이 가수텨라 내놓으라며 깽판 부렸다는 야사 또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던 환상의 과자라는 이미지가 깨진 것은 메이지 시대로, 이때는 교역과 수탈(...)을 통해 쌀과 밀은 몰론, 류큐(오키나와)를 완전히 접수함에 따라 설탕 수급까지 상대적으로 쉬워집니다.

 

그런 연유로 앞서도 언급했듯, 대중화를 목적으로 전분에서 뽑아낸 물엿(水飴)으로 대체한 카스테라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는데, 당시 급격하게 개척되던 일본식 제빵기술과 맞물려 스팀오븐으로 쪄내듯 구운 '일본식 카스테라'가 완성되었고, 사실상 이때부터가 스펀지 케이크 같은 비스코쵸 및 빵들로와 일본식 카스테라가 완전히 분리되는 시발점이 됩니다.


※ 사진자료 관련 업체 목록

키세키 카스테라 / 서울 이태원구 이태원로 208 (現, 해당 오프라인 매장 폐점 - 온라인(본사) 매장 운영중)

마루토제과 (マルト製菓) /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미유키마치 나카츠하라 1532 (§시중 판매 제품 구매)

 

  1. 프랑스어 '비스킷(Biscuit)'과 같은 어원. [본문으로]
  2. 寺島良安, 에도시대 중기의 셋츠 출신 의원. [본문으로]
  3. 중국 서적인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모티프로 하여 스승의 제안으로 쓰여진, 105권 분량의 백과사전. [본문으로]
  4. 마르는 것을 방지하고자 완성품 위에 바르는 정도는 무관. [본문으로]
  5. 다만 대만 카스테라는 대만 섬의 일제강점기 시절에 전래되어 분화한 것. [본문으로]
  6. 흑당, 마스코바도 등으로도 불리는 그것. [본문으로]
  7. 흔히 '말라카'라고도 함. [본문으로]
  8. 種子島銃. 1553년에 사츠마 남쪽의 타네가시마에서 생산한 것을 가리키며,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기도 했음. [본문으로]
  9. 松浦隆信, "마츠우라" 아님. 허나 훗날 이 가문의 후예가 남긴 과자도감, 「菓子百図 (과자백과)」가 카스테라 2차 가공품인 「카스도스」 부활에 결정적 역할을 함. [본문으로]
  10. 1561년 미야노마에 사건 (宮ノ前事件). 요약하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포르투갈 상인과 일본 상인이 각자 나와바리를 두고 칼부림 친 사건. [본문으로]
  11. 1580년 스페인-포르투갈(保留止賀留(ホルトカル)) 병합 → 1584년 對에스파니아(以西巴尒亞(イスハニヤ)), 히라도 항구 개항 [본문으로]
  12. Pão de ló, 포르투갈식 비스코쵸. 스펀지 케이크의 원형 중 하나로, 항해특별식으로도 이용됨. [본문으로]
  13. 규슈 도래 이후로도 일본 본토까지 들어와 활동한 유럽인이 제법 있었으며, 이는 쇄국조치 이후에도 계속 되었는데, 그 때문에 물리적 충돌을 우려하던 남만인이 은밀하게 행동하게 되자, '금발벽안 요괴(金髪碧眼の鬼)'으로도 불리게 됨. [본문으로]
  14. 1609년 사츠마가 류큐정벌을 성공시키긴 했으나, 온전히 일본땅이 되는 사건인 "류큐 처분"은 메이지 5년(1872년)에 일어남. [본문으로]
  15. 쌀 대신 흑설탕을 조공으로 바치게 한 건 1747년부터인데, 직할령으로 통치하던 아마미 군도(奄美群島, 지금의 오키나와와 카고시마 사이에 자리한 카고시마 소속의 군도.)와 같은 제한적인 곳에서, 그것도 무리해서 재배시키느라 섬 주민들이 굶어죽거나 추노하거나, 심하면 처자식을 직접 살해하는 방식으로 머릿수를 줄이는 등의 반발이 발생함에 따라 (※이를 흑당지옥(黒糖地獄)이라 부름.), 흑설탕 공급이 본토 전체를 만족시킬 정도로 원활하지는 않았다고 함. [본문으로]
  16. 지금도 '고급 별사탕'은 몰론, 궁궐 납품용까지 따로 존재함 [본문으로]
  17. 제조법으로 서문에 和。(정제 밀가루 한 근, 백설탕 두 근에다가 노른자 여덟개를 넣고 잘 섞는다.)라 서술했는데, 이는 화한삼재도회 제 105권 "빚음류(造醸類)"편의 가수저라(加須底羅=かすていら)의 설명과 동일함. [본문으로]
Comments